성장문답 #36 ― 현상 너머의 본질을 보는 관점
2026. 4. 8.
실무를 하다 보면 답을 빨리 찾으려고 애쓰지만,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처음 질문을 잘못 잡아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도 어떤 기능의 가치를 정의할 때 “이 기능이 없으면 실제로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 같은 질문을 스스로 던지며 본질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합니다. 이런 경험을 하며 문제해결의 시작은 답을 빨리 내리는 것보다, 제대로 된 질문을 세우는 데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드러난 현상에 바로 반응하지 않고, 그 아래의 질서와 관계까지 보려면 어떤 관점으로 상황을 들여다봐야 할까요?
실무 현장에서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지려 노력하는 여러분의 모습이 참 든든합니다. 현상 너머의 본질을 보려면 ‘현상-경향-속성-이치-원리’라는 층위를 따라 깊이 파고드는 관점이 필요합니다. 눈앞의 결과에만 반응하기보다 그 이면의 속성과 이치를 읽어야 합니다. 현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속성에 개입해야 하고, 속성에 개입하려면 이치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근원적인 작동 원리인 ‘관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현상 이면의 본질을 본다는 것은 곧 관계의 구조를 보는 것입니다. 어떤 요인과 요인의 상호작용으로 현상이 만들어졌는지, 그 요인의 속성은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이죠. 이것이 자인에서 말하는 지혜입니다. 중요한 것은 앎에서 그치지 않고 삶에 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합리적으로 이해해서, 반복적으로 실천하면서, 스스로 변화와 성장을 체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해행증’입니다.
세상을 보는 인식의 프레임: 현경속이원
우리는 문제가 생기면 대개 눈앞에 드러난 현상부터 봅니다. 성과가 저조하면 매출액 숫자부터 살피고, 버그가 생기면 에러 로그부터 들여다보며, 연인과 다투면 누가 먼저 어떤 말을 했는지 따집니다.
하지만 이런 현상들은 마지막에 드러난 결과입니다. 그 아래에는 이 현상들을 만들어내는 조건과 원인이 따로 있습니다. 그래서 현상만 보고 대응하다 보면 열심히 문제를 해결했는데도 비슷한 문제가 다른 모습으로 반복되곤 합니다.
요즘 날이 많이 따뜻해졌죠. 우리가 느끼는 것은 ‘따뜻해졌다’는 현상이지만, 그 뒤에는 사계절 변화라는 경향이 있고, 그 경향은 지구의 공전과 기울기라는 속성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그 속성은 중력과 천체 운동의 법칙이라는 이치 위에서 성립합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 그 이치의 바탕에는 근원적인 원리가 놓여 있습니다.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보이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 아래까지 들어가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볼 때 필요한 것이 ‘현경속이원(현상-경향-속성-이치-원리)’의 관점입니다. 현상에서 시작하되, 그 현상이 어떤 경향에서 나왔는지 보고, 그 경향을 낳는 속성을 보고, 그 속성이 어떤 이치 위에서 작동하는지 보고, 더 나아가 그 이치의 바탕이 되는 원리까지 들어가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단순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를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왜 그런 일이 반복되는가”, “무엇을 바꾸어야 흐름이 달라지는가” 까지 보이기 시작합니다.
탁월한 사람들은 늘 이 지점에서 차이를 만듭니다. 많은 사람은 눈앞의 현상에 반응하지만, 정말 탁월한 사람은 그 현상을 만들어내는 속성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새로운 경향을 만들어냅니다. 일론 머스크가 ‘제1원칙 사고’를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눈앞의 답을 답습하기보다 사물의 가장 밑바닥에 놓인 구조와 조건을 다시 묻는 것입니다. 스티브 잡스 역시 기술 자체보다 그것이 인간 경험 속에서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를 끝까지 파고들었습니다.
자인은 자연의 원리로 세상을 이해하게 해주는 거울이다
원하는 결과를 얻으려면 속성을 이해해야 하고, 속성을 이해하려면 그 속성이 어떤 이치 위에서 작동하는지 알아야 하며, 그 이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결국 더 근원적인 원리에 닿아야 합니다. 자인(자연주의 인본사상)은 그 이치와 원리를 볼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거울’입니다. 저는 인류에게 세 가지 중요한 거울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망원경은 우리에게 우주를 보여주며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깨닫게 했습니다. 둘째, 현미경은 우리에게 생명의 미세한 세계를 보여주며 인간 또한 작은 생명 요소들로 이루어진 존재임을 깨닫게 했습니다.
셋째, 자인경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인간이 작고 미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존재가 어떻게 위대함에 이를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자인에는 자연의 합리로 세상을 이해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인간과 세상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소명이 담겨 있습니다.
이 말을 조금 따뜻하게 풀면 결국 ‘용서하며, 사랑하며‘입니다. 내가 내 한계를 용서할 수 있어야 남을 사랑할 수 있고, 그래야 나와 상대가 함께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는 모두 미약한 존재로 태어났지만, 그 삶까지 미천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더 큰 삶, 최상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자인은 동서양의 철학과 종교 그리고 현대 과학이 축적해 온 통찰을 하나의 체계 안에서 함께 보려는 시도이기도 합니다. 예수와 부처, 공자와 소크라테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인간과 세계를 깊이 탐구해 온 사유의 흐름, 그리고 뉴턴과 아인슈타인, 닐스 보어로 이어지는 과학적 통찰 역시 이 안에 함께 담겨 있습니다.
종교는 계시와 수행을 통해 답을 찾으려 했고, 철학은 사유를 통해 답을 찾으려 했습니다. 자인은 여기에 더해 철학과 과학을 함께 엮어 그 답을 자연의 질서 속에서 찾고자 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과 세상은 자연의 일부이며, 인간의 삶 역시 자연의 원리와 떨어져 있지 않다는 관점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관계로부터 비롯되었다: 관구속기가
자인이 이런 생각으로 정리되기까지는 수많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세상은 무엇이며 어떤 이치로 움직이는가. 인간은 어떤 존재이며, 무엇이 인간의 생각과 감정과 행동을 만들어내는가. 우리의 삶은 이미 정해져 있는가, 아니면 스스로 바꾸어갈 수 있는가. 우리는 왜 갈등하고 왜 사랑하며, 어떻게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을 20년 넘게 끈질기게 밀고 들어가다 보니 발견하게 된 것이 ‘관계’라는 원리입니다. 세상은 관계로 작용하고, 인간도 관계 속에서 존재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관계’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이것을 설명하는 개념이 관구속기가(관계-구조-속성-기능-가치)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관계라는 원리에서 출발합니다. 이 관계가 현실 속에서 일정한 형태를 이루면 구조가 되고, 그 구조는 고유한 속성을 낳습니다. 그 속성이 실제로 작동하면 기능이 되며, 그 기능이 반복되어 쌓일 때 마침내 가치가 드러납니다. 다시 말해, 가치는 처음부터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와 속성과 기능이 작동한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랑, 편안함, 민주주의, 박애, 연민과 같은 가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도 처음부터 주어진 가치가 아닙니다. 사람을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동등한 존재로 바라보는 관계의 원리 위에서 권력이 한곳에 집중되지 않고 나뉘는 구조가 세워졌습니다. 그 구조 안에서 자유, 평등, 참여, 책임과 같은 속성이 형성되었으며, 그 속성이 실제로 작동하면서 토론하고 합의하고 견제하는 기능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기능이 사회 안에서 반복되고 축적되면서 비로소 ‘민주주의’라는 가치가 드러난 것입니다.
이 관점이 중요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좋은 가치를 원한다면 가치만 붙잡아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가치가 드러나게 하는 기능은 무엇인지, 그 기능을 낳는 속성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속성이 자리 잡게 된 구조는 무엇인지 함께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눈앞의 결과만 바꾸는 데 그치지 않고, 더 깊은 차원에서 문제를 풀고 더 나은 가치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는 다섯 가지 질서: 원물생심공
이 관계의 원리가 인간과 세계 안에서 어떤 질서로 생성되고 축적되는지를 설명하는 개념이 ‘원물생심공(원리-물리-생리-심리-공리)’입니다. ‘관구속기가’가 관계라는 원리로부터 가치가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여준다면, ‘원물생심공’은 그 관계의 원리가 인간과 세계 안에서 어떤 층위의 질서로 형성되는지를 설명합니다.

관계에 따른 상호작용이 반복되면서 먼저 물리의 질서가 형성되었습니다. 그 위에 생명의 작용 질서인 생리가 생겨났고, 다시 그 위에 신경과 인지의 차원인 심리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람과 사람의 상호작용이 축적되면서,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기준이자 문화로서 공리가 자리 잡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몸과 마음, 욕구와 감정, 판단과 책임이 따로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이 여러 질서가 한 존재 안에 함께 포개져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 안의 갈등도 여기에서 생깁니다. 배가 고프고 쉬고 싶은 마음은 생리의 작용이고, 좋다 싫다, 하고 싶다 하기 싫다는 반응은 심리의 작용이며, 지금은 참아야 한다,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판단은 공리의 작용입니다. 먹고 싶지만 참아야 하고, 쉬고 싶지만 해야 하며, 좋아하지만 멈춰야 하는 순간들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감정만 보아서는 부족합니다. 그 감정을 가능하게 하는 생리적 조건은 무엇인지, 그 판단을 이끄는 공리의 기준은 무엇인지, 더 깊이 들어가 그 모든 것을 떠받치고 있는 관계의 원리는 무엇인지 함께 보아야 합니다.
진정한 지혜는 관계를 보면서 인과를 다루는 것
여기서 한 가지를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의 본질이 관계라고 해서, 우리가 세상을 언제나 관계의 차원에서 바로 이해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대개 눈앞의 사건을 원인과 결과의 흐름으로 받아들입니다. 그 방식이 실제 삶에 더 익숙하고, 또 유용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왜 일어났는지를 알아야 앞으로를 예측할 수 있고, 예측할 수 있어야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으며, 그래야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세상의 본질은 관계이고, 인간은 그 관계를 인과의 형식으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이 차이를 아는 것이 세상 모든 지혜의 근본입니다. 관계를 보아야 사건의 표면을 넘어 그 아래에 놓인 구조를 이해할 수 있고, 인과를 알아야 현실에서 무엇을 바꾸고 어디에 개입해야 할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관계가 본질을 보게 한다면, 인과는 실천의 방향을 잡게 합니다. 결국 관계와 인과를 함께 이해할 때, 우리는 더 깊이 보면서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게 됩니다.
연인과 다투는 경우를 떠올려 볼까요? 내 입장에서는 상대가 틀리고, 상대 입장에서는 내가 틀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누가 먼저 잘못 말했는지, 누가 더 큰 잘못을 했는지를 따지게 됩니다. 하지만 한 걸음 물러나서 보면, 실제로 일어난 일은 연인과 내가 싸운 것입니다. 다시 말해,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부정적으로 변한 것입니다.
문제를 ‘누가 틀렸는가’의 차원에서만 보면 각자의 인과만 부딪히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관계에서 무엇이 어그러졌는가’를 보기 시작하면, 비로소 겉으로 드러난 사건 아래에 있던 구조와 흐름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사건을 인과의 문제로만 보지 않고 관계의 문제로 함께 읽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앎을 삶에 담는다는 것: 신해행증
하지만 이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본질을 안다고 해서 삶이 저절로 달라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관계를 이해하는 일은 출발점일 뿐입니다. 그 이해가 실제 삶과 관계 속에서 작동할 수 있어야 비로소 지혜가 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신해행증(信解行證)’입니다.
신(信)은 맹목적인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본질이 관계’라는 이치와 원리를 받아들이고, 이를 기반으로 세상과 인간을 이해하는 관점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러한 합리적 관점을 세우는 것이 진정한 지혜를 얻고 실천하는 출발점입니다.
해(解)는 지식을 많이 아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마주하는 모든 상황을 ‘관계론’ 관점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려는 인지적 태도를 말합니다. 해는 단순한 이해가 아니라 앎을 삶으로 가져오는 실천적 배움입니다.
행(行)은 그렇게 이해한 이치를 실제 관계 속에서 살아내는 것입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겉으로 드러난 현상적 요인을 바꾸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요인과 요인의 관계를 읽고 상호작용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것, 그것이 바로 이치를 ‘행하는’ 일입니다.
증(證)은 이치를 행함으로써 스스로 삶의 경험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관계를 다르게 보고, 다르게 해석하고, 다르게 행동했을 때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확인함으로써 우리는 그 이치의 옳음을 체득하고 더 깊이 성장하게 됩니다.
결국 우리가 현상을 넘어 본질을 보아야 하는 이유는, 단지 세상을 더 잘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더 바르게 살아가기 위해서입니다. 자인은 세상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 관계라는 원리를 발견했고, 인간 또한 그 관계 위에 여러 질서를 포개어 살아가는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 앎을 이해하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믿고, 이해하고, 실천하고, 삶 속에서 확인하는 신해행증의 과정을 거칠 때 비로소 지혜는 삶의 태도가 됩니다. 그리고 그 반복 속에서 우리는 현상에 끌려다니지 않고, 관계를 더 깊이 이해하며, 조금씩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해 갑니다.